사단법인 충남포럼(이사장 김성윤)은 22일 오후 정기 이사회와 학술세미나를 천안시 두정동 큰댁 세미나룸에서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공문식 사무총장의 사회와 서문동(남서울대 사무처장)의 “석오 이동녕선생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해 보면서 그 분의 뜻과 사상을 이어가자는 강연을 했다.
석오 이동녕선생은 “지금부터 우리나라는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이 탄생하는 엄숙한 순간입니다. 제국의 신민이 아니고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의 주인은 우리 국민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꼭 광복합시다.”라고 외쳤다. 나라의 독립이 눈앞으로 닦아선 것처럼 확신에 찬 선언이었다. 바로 1919년 4월11일 오전 중국 상하이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 건물 3층에서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선생이 했던 말이다.
석오 이동녕 선생은 1869년 9월 2일(양력 10월 6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성 군수 등을 지낸 교육자 이병옥의 장남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봉소(鳳所), 호(號)는 석오(石吾)로 독립협회 가입을 시작으로 언론·교육활동, 청년회 조직 등을 통해 개화민권사상과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마디로 그의 생애는 조국의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바쳤다.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연좌데모 투쟁을 벌이다 옥고를 치른 후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했다. 고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다.
1910년 다시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해외 동포들의 힘을 모으고,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으며 무오독립선언에도 참여했다.
3.1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서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국호, 임시헌법, 관제제정, 민주공화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후 임종하시는 순간까지 의정원의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 등의 중책을 맡아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끄셨다.
또한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당수로 정당통합 운동에도 노력했다. 인간은 한 줄기 생각하는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강하다. 석오 이동녕 선생은 민족과 나라만을 생각하셨던 대장부였다.
비록 출생한 뒤 한학을 공부하다 상경했지만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리자 1896년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분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이어받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왔다.
▲ 이동녕선생 선양회 초대 상임대표이며 남서울대 서문동 법인처장은 “석오 이동녕선생의 삶과 사상”을 소개하며 그분의 숭고한 뜻을 이어갈 것을 주문했다. © 박익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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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독립운동가 이자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렇게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국의 전 총리 윈스턴 처칠 역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고 말했다.
이동녕선생 선양회 초대 상임대표인 남서울대 서문동 법인처장은 "우리들은 역사상에 나타난 인물은 물론 이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숭고한 뜻을 이어가고 받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터전인 이 나라가 번영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남서울대에 번듯한 기념관을 짓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우리 모두 힘을 합치자"고 말했다.
강연을 끝으로 사단법인 충남포럼의 사무총장이자 남서울대 공문식 처장은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지역발전에 헌신하자고 모인 우리인 만큼 매 분기마다 좋은 강연과 학술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니 바쁘시더라도 빠지지 말아 줄 것"을 강조했다.
▲충남포럼의 사무총장 공문식 박사가 학술회의 사회 및 차기 학술회의에 대한 안내와 의견수렴을 하고 있다. © 박익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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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분기의 강연자는 오수균 강동대학교 경영학과 교수가 강연을 하기로 결의 하고 2019년 제1차 정기 이사회 및 강연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