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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동부보훈지청 독립운동가 알리기 스무번째(최종편) 이동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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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5회 작성일 19-04-2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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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투데이 대전=송병배기자]충남동부보훈지청은 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독립운동가 알리기 스무번째(최종편 )로 이동녕 선생을 지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동녕(李東寧) 선생은 1869년 10월 6일 충청남도 천안(天安)시 목천면에서 태어났다.

17세 때(1885년) 일가가 상경해 서울 종로 봉익동(鳳翼洞)에 정착했다. 24세 때(1892년) 국가시험인 응제진사(應製進士) 시험에 합격했고, 25세 때(1893년) 아버지를 따라 원산(元山)으로 가 육영사업에 조력했다.

28세 때(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해 간사원으로 활약하며 근대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했다. 즉 동지들과 함께 봉건정부의 실정을 규탄하고 외국에 대한 각종 이권의 양여를 반대했다.

30세 때(1898)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개최됐을 때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그 결과 이준(李儁)·이승만(李承晩)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7개월간의 옥중 생활을 끝낸 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이종일(李鍾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자신을 수련했다. 또한 이종일(李鍾一) 선생이 창간․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하며 강대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면하기 위해 개화 및 자강을 힘써 실시해야 함을 역설했다.

34세 때(1902)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목사 등 종교인과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며 기독교의 평등·평화·박애주의를 실천했다.

36세 때(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서울 상동(尙洞) 교회에서 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청년회(靑年會)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이때부터 김구(金九)·이회영(李會榮) 등 지사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여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하다 체포되어 2개월간 투옥 생활을 했다.

풀려나온 후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해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사립학교인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해 한국 동포와 그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뒷날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이때 동지 이상설(李相卨)이 2명의 특사와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가자 한때 귀국해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이후 총서기로서 신민회의 실질적 운영을 맡았고, ‘국외 독립군 기지 개척론’을 주창했다.

또한 안창호(安昌浩)·이회영(李會榮)과 협력해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공립협회 조직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발행을 지원했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하는 일도 크게 도왔으며, 상동학교(尙洞學校)의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만주 서간도 요녕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해 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형제, 이상룡(李相龍) 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운영하고 교포들의 신분 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이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 학교에서는 군사교육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했는바, 후일 독립군(獨立軍)의 초석이 됐다.

그 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나철(羅喆)이 창시한 대종교(大倧敎)에 들어가 활동하며 광복운동에 전념했고, 그러던 중 1914년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일제와의 일대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일본과 동맹국이 된 러시아의 탄압을 받게 되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1915년 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대동신문(大東新聞)과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행·보급했으며, 1917년 노령 니콜라에프스크에서 대종교 포교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며 독립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1918년 11월 길림성(吉林省)에서 김교헌(金敎獻)‧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김좌진(金佐鎭)·여준(呂準) 등과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했다.

1919년 2월 상해(上海)로 건너가 정부조직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마침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됐으며, 동년 4월 13일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이승만(李承晩)이 부임하지 않자 국무총리로 취임해 임시정부의 터줏대감이 됐다.

그해 9월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자 내무총장이 됐으며, 1920년 이동휘(李東輝)가 사임하자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시정부의 위기를 극복했다.

또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는 등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이 표면에 나타나자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조소앙(趙素昻)·이시영(李始榮)·차이석(車利錫)·홍진(洪震)·노백린(盧伯麟)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고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1924년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고 군무총장도 겸임했으며, 이승만(李承晩)의 장기 궐석으로 인해 대통령 직권을 대행했다. 이때 조선총독이 한국인을 시켜 그에게 귀화를 권유했으나 즉석에서 일축했고, 이로 인해 그 부친이 투옥됐다.

1925년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11대)이 됐고, 1926년 국무령과 법무총장을 겸임하며 2차 개헌에 따른 국무령 지도체제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1927년 임시정부의 주석(主席)이 되어 약화된 임시정부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28년에는 종래의 지방적 파벌투쟁을 청산해 민족주의 운동전선을 통일하고자 김구(金九)·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여당적 성격을 지닌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이사장에 추대됐으며, 당 기관지 한보(韓報)·한성(韓聲)을 발행했다.

1929년 세 번째로 의정원의장(13대)이 되어 임시정부의 존폐 위기를 겨우 극복했고, 1930년 두 번째로 임시정부 주석이 됨으로써 중책을 짊어졌다.

1932년 김구(金九)·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의거를 지도해 쾌거를 이루었다.

1935년 세 번째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됐으며, 일제를 박멸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의도 아래 양우조(楊宇朝)·엄항섭(嚴恒燮)·이시영(李始榮)·조성환(曺成煥)·차이석(車利錫)·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로 추대됐다.

일제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전역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그 해 8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구축하고 광복군 편성을 서두르며 대일항전을 준비했다.

1939년 임시정부의 네 번째 주석이 됨으로써 김구(金九)와 합심해 전시 내각을 구성하고 서안(西安)에 대한군사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투쟁하던 중 과로로 인해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급성폐렴증세까지 나타나게 됐고, 결국 1940년 3월 13일 사천성기강(四川省綦江)에서 7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그 순간까지도 선생의 마음은 조국 광복에 있었고, 그 결과 사후에도 독립 운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즉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단축시킬 수 있다고 믿고 유언으로 임시정부 산하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통합을 당부했으며, 이에 따라 그 해 5월 세 정당이 통합해 (중경)한국독립당이 발족됐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대전투데이, DAEJEON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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