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기획1]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선생의 흔적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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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상 댓글 0건 조회 811회 작성일 21-03-17 10:50본문
[내외뉴스통신] 김헌규 기자
-10세 이후, 충북 청주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유년시절 보내
-1979년 대청댐 공사로 100여 가구가 수몰돼 흔적 없어
-이동녕 선생이 수학하던 가옥, 마을 동쪽으로 이전 보존
-후손 이 경묵·송 재옥 부부가 자리 지켜
천안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석오 이동녕선생이 유년시절 연안이씨(延安李氏)종친 어른께 한학을 공부하던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를 찾아 후손인 이경묵씨를 만나 그분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이동녕선생과 주변분들에 대해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재 조명해봤다.-편집자 주-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선생은 1869년 9월 2일(양력 10월 6일) 현재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의성 군수 등을 지낸 교육자 이병옥의 장남(弟남영)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봉소(鳳所), 호(號)는 석오(石吾) 독립협회 가입을 시작으로 언론·교육활동, 청년회 조직 등을 통해 개화민권,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이후 조국의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전생애를 바쳤다.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연좌데모 투쟁을 벌이다 옥고를 치른 후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였고, 귀국하여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다.
1910년 다시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해외 동포들의 힘을 모으고,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으며 무오독립선언에도 참여했다.
3.1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서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국호, 임시헌법, 관제제정, 민주공화정부수립을 선포했다.
이후 임종하는 순간까지 의정원의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 등의 중책을 맡아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끄셨다. 또한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당수로 정당통합 운동에도 노력했다.
1940년 72세를 일기로 급성폐렴으로 중국기강에서 서거, 임시정부 국장으로 모셨고, 광복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해,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해 오늘에 이른다. 유언으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광복운동의 일원화를 남기셨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이동녕선생의 생애 중 유년시절은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동녕선생의 본관은 연안이다. 아버지는 의성군수를 지낸 이병옥(炳鋈)으로 조선 철종 원년(1850년)4월5일에 태어났다.(태어난 곳은 알 수 없음) 고종 때 진사에 합격해 의성군수를 지냈고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원산의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고 전해진다.
이병옥은 슬하에 동녕과 남녕 형제를 두었다. 부친과 이 동녕 선생에 대한 기록은 전해져 오지만 동생인 남녕에 대한 기록은 연안이씨 세보에 육군군위를 지냈다고만 전해지고 자세한 것은 찾아볼 길이 없다.
어린 동녕은 태어난 목천 동리에서 5세 때 부터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익혔다. 10세 전까지 조부 이석구(錫九, 조선 순조)밑에서 성장을 했다.
부친이 군수(郡守)이다 보니 이곳 저곳을 옮겨다녀야하기에 어린 동녕을 공부도 시킬 겸 천안에서 멀리 떨어지긴 했어도 연안이씨의 집성촌이자, 종가가 있는 문의면 후곡리로 보내 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후곡리는 천안과는 약76(190리)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동녕선생이 살던 1860년대에는 그야말로 첩첩산중 굽이굽이 돌아돌아 가야하는 험난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현재에도 이곳 후곡리는 대청호를 주변도로를 따라 청남대 쪽으로 가다보면 동쪽으로 연결되는 편도1차선의 도로가 나온다. 편도 1차선이기에 앞쪽에서 차가 오면 사로 비켜 주어야하는 좁은 도로인긴 하지만 포장이 잘돼 차량이 다니기에는 나름 훌륭하다.
꼬불꼬불 대청호 둘레 길을 따라 가다보면 후곡리에 들어서기 전 고향을 생각한다는‘사향탑’을 만난다. 이곳에서 약 1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이동녕선생이 유년시절 공부하던 후곡리가 나온다.
이곳은 그의 스승이자 집안 어르신인 우련 이병욱(友蓮 李炳勖)선생에게 한학을 배우며 꿈을 키운 곳이다. 선생의 나이가 불과 10세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우련 이병욱에 대해 전해져 오는 기록은 없으나 후손 이경묵씨에 따르면“할아버지는중국의 시선 이태백과 벗이 될 만큼 시문이 높아 우련(友蓮)이라고 호를 지었다.”면서“평생 후학을 가르치며 전국팔도를 다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연안이씨 문중에선 강골있는 재야 학자로 정평이 나있었다.”며 집안 대대로 전해져 오는 우련에 대한 내용을 덧붙였다.
지역의 향토사를 연구하는 천안향토회 김종식회장 따르면“후곡리에 살았던 연안이씨 삼척공파 후손들은 동녕을 공부시키기 위해 이곳에 데려와 느티나무 옆 두칸 짜리 집에서 거주하면서 10대 후반에 (서울로)이사를 갔다고 전한다.”면서“영특해서 다른 사람이 3년 공부 할 것을 3개월 만에 해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마을은 지난1979년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되기 전 까지는 가구 수가 무려 100호에 이르렀고, 주민도 700여명이었다고 말을 어귀에 세워진 사향탑(思鄕塔)에 기록돼 있다.
사향탑은 지난1996에 수몰된 마을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서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탑이다.
어린 동녕은 현재 수몰된 마을의 중간 정도에 있는 이병옥의 가옥에서 수학을 했고, 수몰위기에 놓이자 현재의 후곡길 382(사진)로 가옥을 옮겨 그대로를 복원해 놓았다.
현재 이곳에는 후손인 이경묵(56세)·송재옥(54세)부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들은 어머니가 생전에 이곳에서 살다가 돌아가시자 주말이면 이곳에 와서 양봉을 하고 농사를 짓고 있다.

대청호가 내려 다 보이는 이곳으로 수몰된 마을 동쪽엔 까막눈이 보아도 임산배수형의 명당자리에 연안이씨 15세 충정공(忠定公)이현(袨), 16세 해백공(海佰公)이성징(星徵), 18세 이우당(二憂堂)이만원(萬元), 25세 직산공(稷山公)이봉영(鳳寧)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이경묵씨에 따르면“이 마을에 대기업의 총수들이 태어났고, 명문대 출신들이 많이 배출됐다.”며 후곡리가 좋은 터임을 강조했다.
이런 곳에서 이동녕선생은 유년시절 꿈을 키우며 공부에 매진했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공부는 집안 어른 이병욱 선생이 맡았고, 헤어진 후에도 안부를 전하는 편지가 지금도 이경묵씨의 형제들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대부분의 편지는 초서체로 동녕이 스승인 이병욱에게 보내는 안부편지다. 나라의 독립과 관련된 내용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에 이경묵씨는“3개월 전에 독립기념관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이 찾아와 이동녕 선생과 관련된 자료들을 확인하고 갔다.”면서“이 자료들을 독립기념관에 기탁하겠다.”고 밝혔다.
이동녕 선생은 10대 후반인 17세 때, 이곳 후곡리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겨 당시 한성부 종로 봉익동(鳳翼洞)114번지에서 살았다. 이때부터 봉익동의‘봉’자를 따서 자를 봉소(鳳所)라 했다며 천안향토회 김 종식회장은 밝히고 있다.
18세 때에는 영애군수인 아버지를 따라 경북 영해로 20세 때에는 평양군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24세 때는 응제진사시험에 합격해 이때부터 호를 석오(石吾)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25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서 광성학교를 설립(후에 광명학교로 개명)하고 이듬해인 26세(1894년) 때에는 풍산김씨 경선(豐山金氏 慶善)과 결혼해 의식,의백 형제와 여식 의순,의신 등 2남2녀를 뒀다.
격동의 해인 1894년은 전북 정읍 고부에서 백성들을 수탈했던 탐관오리 조병갑을 탄핵하려고 전봉준이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해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이 상해에서 피살, 8월에는 청일전쟁, 갑오개혁이 일어난 때다.
1896에는 독립협회에 가담(후 만민공동회 변경)해서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임금에게 상소하자,이로인해 이준,이승만과 함께 투옥되고 이때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광무원년으로 했다.
이동녕선생은 1940년3월 72세의 일기로 중국기강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이동녕 선생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에 비해 김구선생 보다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
또한 이동녕선생에 대해 잘못 쓰여진 책과 동상에 대해 [뉴스기획2]에서 다루고자 한다.
khk1102@news-i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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