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오 이동녕선생 연보
석오(石吾)
자호(自號)로서 지조와 겸손을 의미하며, 그 뜻이 돌과 같이 단단하고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아니함을 의미함.
Ⅰ. 출생 및 유년기

Ⅱ. 국권회복 운동기
1. 독립협회 참여(1896년)
독립협회추최로 만민공동회에서 잘못된 정치를 탄핵, 상소하며 국민운동 일선에 나섬.
이준 · 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름.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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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서울에서 서재필, 이상재 등이 조직한 사회정치단체.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에 걸쳐 열강에 의한 국권 침탈과 지배층에 의한 민권 유린의 상황 속에서,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사상에 의해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운동을 전개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임 |
독립협회가 행한 정치활동의 하나로 시민·단체회원·정부관료 등이 참여한 대중집회임. 1898년 정부의 친러적 정책과 비자주적 외교에 반대하여 일어난 집회로 자주외교와 국정개혁을 주장하는 등 성과를 보였음 |
2. 제국신문 논설위원(1898년)
석오 이동녕 선생은 1898년 이종일이 창간한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하면서, 이종일의 가르침 받아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사상을 정립하였으며 국민 참정권을 역설함.
<제국신문>
1898년 8월 10일 창간, 초대 사장은 이종일, 주필은 이승만이었음. 이 신문에 관계했던 지식인들은 대부분 전직 또는 현직 관리였고 대한자강회나 대한협회 등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이었음.
서민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국민계몽을 내세우고 한글 전용을 고수했으며, 민족지로서의 논조를 펼침
3. 상동교회 활동 및 국권회복운동(1904년)
석오 이동녕 선생은 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 양기탁 · 신채호 · 조성환 등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전국이나 해외에서 교육사업을 전개해야 민족의 미래가 있다고 역설함.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다 투옥됨.
4. 서전서숙 설립(1906년)

석오 이동녕 선생은 1906년(38세) 만주 북간도 용정촌에서 이상설 · 여준 등과 같이 서전평야에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 교육 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 동포와 2세의 민족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함.
< 사진 : 만주 북간도 용천동에 위치한 서전서숙>
5. 신민회 활동(1907년)
석오 이동녕 선생은 1907년 안창호 · 전덕기 · 양기탁 · 이동휘 · 이갑 · 노백린 · 유동열 · 이상설 등 애국계몽운동가들을 총 망라한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총서기로서 실질적인 신민회의 운영을 담당함. 오산학교, 대성학교 설립에 기여하였고 상동학교를 설립·교사로 재직함.
<신민회>
1907년 4월 안창호 발기로 양기탁 · 이동녕·이회영·이상재·김구·신채호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으며, 비밀결사로서의 신민회는 한말의 지도적 인사들이 거의 모두 회원이 됨으로써,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되었음. 신민회가 일제 관헌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 밑에서 조직된 지하정당임에도 회원수가 약 800명 정도였으나 일제의 음모에 의한 105인 사건으로 점차 약화되고 해외 독립운동에 눈을 돌리게 됨.
6. 경학사(1911년) 및 신흥무관학교 활동
1910년 한일합방 뒤 만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하여 이석영 · 이철영 · 이회영 · 이시영 · 이상룡 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립해 교포들의 신분 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으며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함.
신흥 학교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확장, 개편되어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 서로군정서의 창립 모태가 되었으며 졸업생들이 청산리전투에 참가 대승을 거두었음.
<신흥무관학교>
1910년 신민회의 이회영, 이시영 등이 남만주에 신흥 강습소를 조직하였는데 신흥 중학으로 개칭하였다가 1919년 신흥 무관 학교로 개칭했으며, 이후 류허현 고산자에 2년제 고등 군사반을 두어 고급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분교를 두어 초등 군사반을 편성하여 훈련을 시켰고, 1920년 폐교 시까지 졸업생 3500여 명을 배출하여 독립군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 및 봉오동 전투에 참여함.
<석오가 작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애국가>
화려강산 동반도는 우리의 본국이요 / 품질 좋은 단군자손 우리 국민일세 /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 우리나라 우리들이 길이 보전하세
7. 대한독립선언서 선포(1919년)
1917년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나철과 함께 포교하였으며 민족사관 및 민족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다졌으며 1918년 길림성에서 김교헌 · 조소앙 · 조완 · 김좌진 · 여준 등 민족 대표 39명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에 참여하였고, 1919년 2월 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함으로써 국권피탈의 무효성을 강조함
Ⅲ. 임시정부시기
1.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에 취임(1919년)
- 1919년 3·1운동 후 4월 상하이에서 상하이와 한국, 러시아 등 각 지방의 한인 대표자 29명이 모여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선출되셨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삼권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를 선포함.
- 국민기본권인 자유권, 참정권, 평등권을 규정하고 국민의 기본의무인 교육, 납세, 병역 의무를 규정함.
- 대한제국 멸망(1910년) 멸망 후 9년만에 대한민국 국가를 건국함.
- 임시의정원의 성격은 제헌국회이며 이는 대한민국 국회의 기원이며 석오 이동녕 선생은 의장에 선출됨.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가진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제8조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
제9조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전부 폐지한다.
제10조 임시 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대한민국 원년 4월 11일
2. 시사책진회 활동(1921년)
1921년 독립운동전선 내부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전체 독립운동의 방향전환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되었고, 한형권이 소련 정부로부터 받아온 독립운동 원조금 사용 문제로 정쟁과 파쟁에 휩싸였을때,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김구 이시영 조소앙 안창호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대동단결을 호소하심.
<석오 어록>
“우리가 살길은 오직 대동단결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함에 있소”
3. 한국 독립당 창당(1929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들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정당 정치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음.
한국 독립당은 임시정부와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루며 임시정부를 운영하는 기초세력이자 여당의 역할을 담당함.
<한국독립당>
1920년 후반 임시정부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민족진영의 단합과 쇄신을 도모하고 종래의 파벌적 감정을 청산하여 해외독립운동전선을 통일하기 위해 1930년 1월 25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이사장에는 이동녕, 이사에는 김구 · 조완구 · 김철 · 안창호 · 이시영 · 조소앙이 선임됨
(정강 정책)
① 국내민족에 대하여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혁명역량을 집중한다.
② 엄밀한 조직하에서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 진행한다.
③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운동단체와 함께 협력을 도모한다.
4. 한인애국단 결성과 활동에 기여(1931년)
임시의정원 의장이자 국무의원으로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을 도와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적극 지원함.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고 중일전쟁의 반발과 함께 상해를 떠나 항주 → 진강 → 장사 → 광주 → 유주 → 기강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며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함.
<한국독립당>
193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있던 김구에 의해 세워진 일본 제국의 주요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독립운동 조직으로, 1932년 이봉창의 의거 (사쿠라다몬 사건)과 상하이에서의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1932년), 유상근, 이덕주의 다롄 폭파 사건(1932년) 등을 지도하여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에 대항함.
(사진 왼쪽부터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5.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및 주석 역임
석오 이동녕 선생은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제도로 개정되자 잠시 국무령이 되었으며, 법무총장도 겸임하였고, 192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약화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 놓았으며, 1940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총 네 번에 걸쳐 역임(1930~1932, 1935~1939, 1939~1940)함.
6. 기강에서 영면(1940년 3월 13일)
석오 이동녕 선생은 1940년 3월 13일 사천성 기강에서 72세를 일기로 서거하셨으며, 3월 17일 최초의 국장으로 장례를 마쳤고, 광복 후 백범 김구에 의거 효창원에 안치됨.
최후의 1인까지 존경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석오이다. 이동녕은 나를 밀어주었고 공적을 뒤로하고 인화단결에 앞장선 큰 인물이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쓴다. 또한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 했으니 그것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 김구, 백범일지
석오 장은 나 한 개인에게 뿐만아리나 우리 임정의 큰 인물이었다, 석오 장은 깔끔한 용모답게 공적인 일이던 사적인 일이든 무슨 일을 처리하든지 공정했다. 주의나 주장이 확고하면서도 언제나 말수가 적고 청렴했던 탓에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이들도 선생을 존경하고 흠모하리를 마지 않았다.
- 김의한의 부인 정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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